
(사진 설명 : 부여 관북리 유적 발굴지 전경(악기출토 수혈 19호, 목간출토 배수로1호와 수혈19호.부여군(c)))
사비 천도 직후 행정·재정 기록 담긴 목간 329점
왕궁 화장실 추정 구덩이에서 7세기 실물 관악기(가로 피리) 최초 확인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대량의 목간과 7세기 관악기는 백제 사비 왕궁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다. 수도 이전이라는 국가적 전환기 속에서 백제가 어떻게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궁중 문화를 운영했는지를 실물 자료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2월 5일, 부여군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 관북리 유적 제16차 발굴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삭설을 포함해 329점에 이르는 목간과 대나무로 제작된 관악기 1점이 출토됐다. 목간은 국내 단일 유적 기준 최대 수량이며, 사비기 백제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로 평가된다.

관북리 유적은 부소산 남쪽의 넓은 평탄지에 위치해 있으며, 1982년 이후 지속적인 발굴을 통해 대형 전각 건물지와 수로, 도로 시설, 대규모 대지가 확인돼 사비기 왕궁지로 인식돼 왔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왕궁 공간이 단순한 의례 공간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목간은 사비 천도 초기 단계의 수로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경신년(540년)’과 ‘계해년(543년)’이 기록된 목간을 통해 제작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데, 이는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538년 직후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수도 이전 이후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국가 운영을 안정화해 나가던 시기의 기록이 실물로 확인된 셈이다.
목간의 내용은 인사 행정과 재정 운영에 집중돼 있다. 관등과 관직, 공적에 따른 인사 발령, 월별 식량 지급 내역 등이 기록돼 있으며, 문서를 관리·보존하기 위해 끈으로 엮은 편철 목간도 확인됐다.
‘공적이 네 개인 도족이를 소장군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담은 편철 목간은 백제의 인사 행정이 문서 중심으로 운영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함께 출토된 삭설 목간은 문서를 작성하고 수정하며 행정을 수행하던 현장의 흔적을 전한다.
또한 상·전·중·하·후부로 구성된 사비 도성의 중앙 행정 구역과 웅진·하서군, 나라·요비성 등 지방 행정 단위가 적힌 목간은 사비 도성을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통치 체계가 재편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백제가 사비 천도를 계기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해 나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목간에 기록된 내용은 행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입동’과 같은 절기, 식물명으로 해석되는 ‘인심초’, 인명으로 보이는 기록,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여겨져 왔던 ‘전(畑)’ 자 등은 백제의 문자 사용이 폭넓고 유연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백제가 동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활발히 교류하며 선진적인 문화를 형성해 갔음을 엿볼 수 있다.
이번 발굴에서 함께 출토된 관악기는 백제 궁중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조당으로 추정되는 7세기 건물지 인근의 구덩이에서 발견된 이 악기는 대나무 재질에 네 개의 구멍이 뚫린 가로 피리, 즉 횡적으로 분석됐다. 구덩이 내부에서 인체 기생충란이 검출돼 조당 부속 화장실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됐으며, 궁중에서 사용되던 물품이 폐기된 맥락을 보여준다.
엑스레이 분석 결과 한쪽 끝이 막힌 구조로 확인된 이 악기는 오늘날의 소금과 유사한 형태로, 백제 횡적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한 사례다. 삼국시대 전체를 통틀어 실물 관악기가 출토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문헌 기록과 도상 자료로만 추정되던 백제 음악 문화가 실제 악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크다.
관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목간과 악기는 백제 사비 왕궁이 정치와 행정, 의례와 문화가 함께 작동하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앞으로도 체계적인 발굴과 연구를 통해 사비기 백제의 국가 운영과 문화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밝혀 나가고, 그 성과를 국민과 학계에 지속적으로 공유해 나갈 계획이다.(부여신문=이정미 기자)